2011. 10. 4. 10:33

기도

체력이 남아 있어야 시도만이라도 가능한 게 항암 치료라는 걸 내가 알게 됐을 즈음에는, 이미 서열 1위 오빠의 체력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다음 주에 있을 사진전 준비를 하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아들-그러니까 내게는 조카-에게 용돈을 쥐어주며 주의사항을 일러주는 일련의 일상생활을 하는 그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백혈구 수치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장출혈로 피범벅이 된 그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게 그의 마지막 입원이 될 수도 있다고. 어쩌면 그가 퇴원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내 무섭고 흉한 예상을 깨고 그는 퇴원수속을 밟고 집으로 돌아왔다. 누구의 손길도 거부하면서 바닥에 가만히 누워 아픈 데를 어루만지는 그의 곁에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책을 읽었다. 책장을 넘기며 조용조용, 이모들의 험담을 늘어놓는 나를 몇 번 쳐다보면서 오빠가 희미하게 웃은 것 같기도 했다.  

오빠를 찾아온 문병객들, 내 모친을 위시한 이모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 나도 함께 일어섰다. 가방을 챙기는 내게 그가 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손목을 내밀며 작게 말했다.
"이쪽으로 와서, 나 좀 일으켜봐."
 가볍게,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그의 몸이 일으켜 세워져서 새삼 슬퍼졌다. 그 가느다란 손목으로 그가 내 손을 꼭 잡고는 자기 방으로 나를 데려가 세워두고는 무언가를 한참이나 뒤적이며 찾기 시작했다. 나오려는 눈물을 꾹꾹 누르며, 나는 괜히 그가 기르는 요크셔테리어를 괴롭혔다. 

한동안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그가 내게 내민 것은 보이차 반 상자와 파커 볼펜 세트.  
우물우물, 고마워요 오빠 잘 쓸게요 소리를 입에서만 중얼거리고서 도망치듯 그의 방을 빠져나와 엘레베이터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이 눈물과, 이 두려움들이 다 헛된 것이 되기를 빈다. 제발.  
2011. 9. 15. 14:57

가을



가을이 시작되고 있다. 날씨는 여전히 초여름의 그것임에도.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었다'.....
정호승, <철길에 앉아> 중에서

 
기다림. 기다림. 긴 긴 기다림.


 

... 서열 1위 오라버니께서 포착한 장면. 힐 신고 철길 위에 서봤어요? 안 서봤으면 말을 하지 말아요... -_-  
2011. 8. 30. 08:24

대폭소

아니 누나, 그런 쪽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그 간접 경험들 하며.... 읽는 책들이 아깝다, 책이 아까워.

내가 읽는 책에 나오는 애들은 연애 안해! 공부하고 시조 읊고 그림 그리고 노래 부르지!

....도저히 못 빠져나올 구멍을 하나 만들어줘?

뭐...뭔데?

음악 듣지 마.









아, 두어 시간 배를 잡고 웃었더니 배 아프고 얼굴 땡겨....  
2011. 6. 22. 15:23

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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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25. 11:55

에피소드 #6 - 자장가

"자장가!"

잠자리에 누워 전화를 하다 불쑥 저렇게 드립을 던지면(!) P군은 보통 윤상의 곡을 불러준다. 하지만 어제 밤에는 토이의 lullaby를 특별히 요청했는데...

"굿나잇~ 굿나잇~.....뭐지?"
"... 편히 쉬어요 -_-"
"편히 쉬어요~ 굿나잇, 굿나잇 그대 편히 쉬어요. 굿나잇~ 굿나잇~ ....그 다음엔?"



결국 난 가사 말해주고 P군은 부르다가 한 곡 끝. 이게 뭐냐며 서로 미친 듯이 웃다가 잠이 다 깨버렸다는 웃기지만 조금은 슬픈 이야기. 
2011. 5. 12. 09:50

벌써 일 년

생일 축하합니다, 그의 맑은 목소리로 부르는 생일 노래가 전화 저편에서 울리고 나는 자정을 넘긴 밤과 함께 웃었다. 

5-6년지기 녀석들을 불러모아 조촐하게 파티 비슷한 시간을 보냈다. 누가 생각해냈는지 몰라도 지상 최고의 조합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치킨과 맥주를 시작으로 강남의 어느 바에 들어가 초를 켜고(30번째 생일이니 깔끔하게 초 세 개만 꽂자고 해줘서 고맙다 이 자식들아-_-) 케익을 "퍼먹고", 그 순간 흐르던 퀸의 음악은 얼마나 드라마틱했는지.

함께 할 수 없어 아쉽고,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한 하루.
이렇게, 또 한 살을 먹었다. 
2011. 5. 11. 09:15

Comment

누가 뭐라고 해도 당신은 내 하나짱. 










아 네네~ 아무렴요. :)  
2011. 5. 7. 09:27

에피소드 #5 - 발

여름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그 무렵 늘 그랬듯이 그는 구로 디지털 단지 역 부근에 차를 대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녹초가 된채 그의 옆에 무너지듯 주저앉고 나니 피곤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다리를 끌어당겨 운동화를 벗기고, 반 강제로 양말마저 벗기고 나서는 자기 다리 위에 내 다리를 올려놓은 자세로 물티슈를 꺼내 발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한여름에 집에서도 양말을 챙겨신을만큼 맨발을 드러내는데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아마 그때 (말도 안되는)앙탈을 부렸던 것 같다.
"하지 마! 냄새 나!"
"가만히 있어. 냄새는 무슨."

버둥대는 다리를 꾹 누르고 꼼꼼히 발을 닦다가 발가락에 이르러,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발가락 참 가지런하네. 도시락 같다. 계란말이."
"계..계란말이...?"
물기가 남아있는 내 발을 쥐고 자분자분 주무르며 그는 다시 말했었다.
"응, 이쁘네. 당신 발."

그저께, 요즘 최악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그가 그 바쁜 시간을 쪼개 내 생일 선물로 운동화를 샀다는 말을 전해왔다. 어제 밤 통화를 마칠 무렵...
"당신 운동화를 손위에 올려놓고보니까, 그 때 생각이 났어. 당신을 발을 닦아주고 내 손에 쥐었던 때 말야."
그리고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이런 남자가 다시 만나질까? 내 발까지 사랑해주는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 
 
2011. 5. 3. 10:39

치킨집에서

거의 1년만에 만나는 친구였다. 원래대로라면 강원도에서 상경한 녀석과 더불에 강남에서 만났어야겠으나, 강원도 녀석이 본인 표현으로 술에 "꼴아서"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덕분에 오붓하게 둘이서만 사당역 부근의 치킨집엘 들어갔었드랬다. 

메뉴를 고르고 500 두 잔을 함께 주문하는 내게, 종업원 아가씨가.... 신분증을 요구했다. ... 참고로 우리는 이미 서른을 넘겼다;
"......??"
친구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우리는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식으로 영업하시는구나~?"
 친구가 가볍게 농담을 던졌으나,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지갑을 열어 신분증을 보여준 다음에서야 맥주를 주문할 수 있었다. 주민등록증에 적힌 출생년도를 보더니 머쓱해하며 카운터로 돌아간 그녀. 자신들끼리 대화를 나누고는 우리쪽을 흘깃 쳐다본 그녀의 동료가 던지는 말이 '개와 비슷할 정도로 예민하다는' 내 귓전에 전해졌다.
"야, 그렇게 단골이 만들고 싶었냐!" 

우리는 이미, 서른을 넘겼다. :)  
2011. 5. 2. 10:48

에피소드 #4 - 도전! 스테이크.

메리어트에서 19만원짜리 스테이크를 20분 안에 먹으면 해당 스테이크는 무료~ 인 프로모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와서는 말하기를.
"해보고 싶다."
하시기에 대답해 드렸다.
"다음에 같이 갑시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씀하신다.
"실은 당신이 도전하는 걸 보고 싶어."
"... 만일 실패하면 비용은 당신이 지불하나요?"
"아 물론이죠."
"그럼 뭐. 갑시다."

그러자 그 분의 대답.
"하지만 만일 성공하면 당신을 비난하겠어."




어쩌라고-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