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29. 08:48

사찰-성당 답사기 2. 익산 미륵사지

*이 답사기에는 사진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쥔장이 재앙 수준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서지요 -_- 




원래대로라면 여수로 갔어야 했다. 내 여행 계획대로라면 분명히 그랬다. 엑스포가 열리고 있고, 장범준(버스커 버스커)의 구성진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여수 밤바다"를 반드시 현장(!)에서 듣고 말겠다는 꿈에 부풀어 서울을 출발할 때 까지만 하더라도. 

하지만 나는 몰랐다. 사흘 연휴 +  여수 엑스포의 여파가 그렇게도 심각할 줄. 

여수로 직행하는 차편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가 살고 있는 익산을 경유지로 택한 것 까지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네 시간 반이 걸릴 거라고는 나도, 나를 기다리던 내 친구도 예상 못했었다. 5시에 출발한 고속 버스는 10시가 다 되어서야 나를 익산에 던져 놓았다. 고속버스 터미널 차창 밖에서 목을 빼고 나를 기다리는 친구를 발견하는 순간 깨달았다. 여수엔 다 갔구만. 


친구의 동거인(!)을 쫓아버리고, 새벽 네 시 넘어서까지 수다를 떨었다. 명확히 말하자면 나는 친구의 침대를 차지하고 누워서, 친구는 제 침대에 기대서 뒹굴댔다. 특별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고, 별스럽게 진지한 대화가 오가지도 않았다. 단지 우리는, 낄낄대다 말다를 반복하며 오래간만의 해후를 즐겼을 뿐이다. 


"손님이 안 자는데 나 혼자 잘 수는 없다"고 쏟아지는 수면 앞에 굳건한 방어태세를 보이던 친구는 나를 이불 속에 구겨 넣고는 방에 불을 꺼주고, 내가 잠들 때까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_- (친구님 따끈한 우유에 자장가도 추가해 주세염) 아침에 깨어나보니 옆방에서 고이 잠들어 있더라. .... 그렇지. 나는 손님 주제에 안방은 물론이고 주인 침대까지 차지한 불한당이었던 거다. 


배고픔으로 사나워진 내게 아침을 먹여놓고, 친구가 물었다.


"음, 지금 미륵사지 석탑은 보수 중인데, 가볼래?"

"콜!"


....


분명히 어린 시절 아버지 손에 이끌려 미륵사지에 와봤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데, 복원이 완료된 동탑 앞에서 아무 것도 떠오르질 않았다. 동탑은 분명히 기계로 깎아 복원했으려니 중얼대며 아무 기대 없이 복원중인 서탑 덧집에 들어섰다. .... 


좋은 그림은 그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이 비단 그림에 국한되어 있지 않음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덩그러니 비어 있는 탑터(미륵사지 서탑은 복원을 위해 전면 해체가 이루어져 있는 상태다.), 5층 건물 높이의 덧집 안에 차곡차곡 들어찬 천 오백년 전에 깎은 돌들, 흙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기운, 고집스럽고 단단하게 다져진 흙바닥....

지독히 넓은 절터에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막상 나를 압도한 것은 그 넓은 절터도, 4미터짜리 당간지주도 아닌 미륵사지 서탑의 탑터였다. 상상 못했던 크기, 넓이, 세월을 지배하는 우아함.

"세상에.....! ..... 세상에! 미륵사가 이렇게 큰 절이었어....?!" 

기단부에서부터 천천히, 나는, 눈으로 허공을 훑어나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고개를 들고 빈 데를 바라보는 내게 친구가 물었다. 

"복원된 탑이 보여?"

"응!"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다니 역시 너는 내 친구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네 친구여. 


흙이, 돌들이, 비어 있는 탑자리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 돌들이 쌓이고 쌓여서 동쪽에 서 있는 저 탑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장대한 탑이 될 거라고, 똑같이 생겼지만 절대로 똑같지 않은 탑이 되려고 하고 있다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다시 온몸에 소름이 쭉 돋는다. 7세기, 대체 백제의 석공들은 무슨 수로 그 돌을을 쪼고 다듬어서 그토록 아름답고 우아하면서도 거대한 탑을 만들어냈을까. 


온갖 감탄사를 연발하는 내게 친구가 말했다.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다고. 여기 네번째 와보는데, 이렇게 감동하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내가 감동하는 모습에 자기가 감동했다고. ... 아, 그러니까, 미륵사지의 탑터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돌아오는 길, 나는 여전히 내가 무언가에 깊고 길게 감동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에 감사했다. 


서울로 돌아와 자료를 검색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동탑은 역시 기계의 힘을 빌어 태어난 아이였다. 그리고 서탑은 원래 탑을 이루고 있던 돌들을 최대한 이용하고, 돌이 남아 있지 않은 부분만 새로 만들 예정이라고. 그렇게 내게는 익산에 다시 내려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생일 선물 챙겨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기사 노릇 해주고, 심지어 돌아오는 차편까지 해결해준 친구 H에게 감사를 전한다. 뭣보다 미륵사지에 가보겠느냐고 물어준 데에 두 배로 감사.... 덕분에 많이 가벼워졌었어. 네 덕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