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가 넷에 외삼촌이 둘이다. 우리 모친까지 7남매가 각각 결혼해서 낳은 자식의 (원래) 숫자를 대충 헤아려보면 열 다섯 명이 넘으니 가족 아닌 타인에게 그들의 이름까지를 일일이 기억하라고 하는 건 폭력에 다름아닐게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누군가에게 이종 사촌들의 이야기를 할 때면 농반 진반으로 서열 몇위, 라는 설명을 해주곤 했다.
큰 이모의 큰 아들인 오빠는 막내 외삼촌과는 여덟 살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나하고는 무려 열일곱 살이나 차이가 나는 서열 1위였다. 공부와 사진과 비오는 날과 운동을 좋아했고, 그런 만큼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짓궂고 괴팍한 구석이 있어서 마귀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다. 멀리 살고 있어 왕래가 적었던 서열 4, 7, 8위의 사촌언니들과는 조금 서먹했던 대신에 5,6 위 오빠들 밑으로 태어난 "드디어 여자"였으며 "여자로는 막내"던 나를 예뻐하면서도 그걸 괴롭히는 걸로 표현하곤 했던 사람이다.
레프팅 하러 가자고 데려가서는 강물에 머리부터 빠지도록 집어 던지고, 이모네서 가족 모임을 갖고 돌아올라치면 신발 속에 포도가 들어 있고, 호박 꿀탱이 오리 못난이라고 부르며 간지럼을 태우고, 새치 100개를 다 뽑을 때까지 놔주질 않고. ... 심지어 서른이 넘어서까지 나는 오빠에게 열두서너 살 무렵의 꼬맹이로만 각인되어 있었다.
위암 4기 진단과 6개월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그는 막 우리 나이로 마흔 일곱이 되어 있었다. 2010년 1월, 진단과 수술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고 그 이후 지속되던 항암치료를 받는 내내 그는 불평도 분노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버티고, 또 버텼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모들을 모시고 여행을 하고 돌아다니고, 병중에도 늘 하던 정기 전시회를 거르지 않았다. 나는 그러니까... 올해 11월 초에 그가 마지막 입원을 하기 직전까지도 그의 쾌유를 의심하지 못했었다.
2011년 10월 13일, 다들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고 말하는 그의 생일날 그를 찾아갔다. 자기 방에 가만히 누워서, 항암치료를 하지 않아 자라나기 시작한 밤송이 같은 머리를 하고서 그는 내게 싱긋 웃어보였다. 서랍을 뒤져 봉투를 하나 쥐어주며 한사코 거절하는 내게 오빠는 그랬었다. 얼른 받으라고. 기운 없다고. 사람이 곧 죽을 때가 되면 이렇게 안하던 짓도 하고 그러는 거라고.
채 2주가 지나지 않아 오빠가 마지막이 될 입원을 했고, 2011년 11월 13일, 병석에 누운 그를 찾아가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사람이 회생하기가 쉽지 않겠다. 그리고 11월 23일. 몰핀 투약량이 늘면서 정신이 들었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그를 찾았던 날 그가 늘 하던 것처럼 고르고 건강한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가까이 다가간 나를 꼭 끌어안고서, 오빠는, 말했다.
"미안해."
그 말을 듣는 순간에, 그를 잡고 있었던 내 마지막 끈을 놓았다. 순순히, 그가 이제는 우리 곁에 머물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울컥 솟은 눈물을 애써 감추고서 그의 손을 꼭 잡아주고 돌아서던 길이 마지막이었고, 그가 살아서 내게 한 마지막 말은 결국 미안해, 가 되었다. 그는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48세의 생일을 보낸 후 한 달 반 만에 세상을 버렸다.
오빠를 보냈다. 원래대로라면 이제는 그의 친동생이 서열 1위라는, 내가 붙인 하잘것 없는 호칭을 물려받아야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지금도 앞으로도 내게 서열 1위는 그인 것을. 참 별볼일 없고 의미도 없는 호칭일지언정 그 이름을 주고 싶은 사람은 그뿐인 것을.
아직 훈련병 신분이라 화장이 끝나는 것도 다 보지 못하고 귀대해야 했던 그의 아들이 부대로 출발하기 직전 나를 안고서는 속삭이는 것처럼 남긴 한 마디가 아직도 귓전에 울린다.
"고모, 부탁해요..."
1964년 10월 13일 - 2011년 11월 27일
부디 평안히 영면하기를.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은 곳에서 이제는 웃고 있기를.
내 사랑하는 서열 1위 오라버니.
큰 이모의 큰 아들인 오빠는 막내 외삼촌과는 여덟 살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나하고는 무려 열일곱 살이나 차이가 나는 서열 1위였다. 공부와 사진과 비오는 날과 운동을 좋아했고, 그런 만큼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짓궂고 괴팍한 구석이 있어서 마귀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다. 멀리 살고 있어 왕래가 적었던 서열 4, 7, 8위의 사촌언니들과는 조금 서먹했던 대신에 5,6 위 오빠들 밑으로 태어난 "드디어 여자"였으며 "여자로는 막내"던 나를 예뻐하면서도 그걸 괴롭히는 걸로 표현하곤 했던 사람이다.
레프팅 하러 가자고 데려가서는 강물에 머리부터 빠지도록 집어 던지고, 이모네서 가족 모임을 갖고 돌아올라치면 신발 속에 포도가 들어 있고, 호박 꿀탱이 오리 못난이라고 부르며 간지럼을 태우고, 새치 100개를 다 뽑을 때까지 놔주질 않고. ... 심지어 서른이 넘어서까지 나는 오빠에게 열두서너 살 무렵의 꼬맹이로만 각인되어 있었다.
위암 4기 진단과 6개월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그는 막 우리 나이로 마흔 일곱이 되어 있었다. 2010년 1월, 진단과 수술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고 그 이후 지속되던 항암치료를 받는 내내 그는 불평도 분노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버티고, 또 버텼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모들을 모시고 여행을 하고 돌아다니고, 병중에도 늘 하던 정기 전시회를 거르지 않았다. 나는 그러니까... 올해 11월 초에 그가 마지막 입원을 하기 직전까지도 그의 쾌유를 의심하지 못했었다.
2011년 10월 13일, 다들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고 말하는 그의 생일날 그를 찾아갔다. 자기 방에 가만히 누워서, 항암치료를 하지 않아 자라나기 시작한 밤송이 같은 머리를 하고서 그는 내게 싱긋 웃어보였다. 서랍을 뒤져 봉투를 하나 쥐어주며 한사코 거절하는 내게 오빠는 그랬었다. 얼른 받으라고. 기운 없다고. 사람이 곧 죽을 때가 되면 이렇게 안하던 짓도 하고 그러는 거라고.
채 2주가 지나지 않아 오빠가 마지막이 될 입원을 했고, 2011년 11월 13일, 병석에 누운 그를 찾아가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사람이 회생하기가 쉽지 않겠다. 그리고 11월 23일. 몰핀 투약량이 늘면서 정신이 들었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그를 찾았던 날 그가 늘 하던 것처럼 고르고 건강한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가까이 다가간 나를 꼭 끌어안고서, 오빠는, 말했다.
"미안해."
그 말을 듣는 순간에, 그를 잡고 있었던 내 마지막 끈을 놓았다. 순순히, 그가 이제는 우리 곁에 머물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울컥 솟은 눈물을 애써 감추고서 그의 손을 꼭 잡아주고 돌아서던 길이 마지막이었고, 그가 살아서 내게 한 마지막 말은 결국 미안해, 가 되었다. 그는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48세의 생일을 보낸 후 한 달 반 만에 세상을 버렸다.
오빠를 보냈다. 원래대로라면 이제는 그의 친동생이 서열 1위라는, 내가 붙인 하잘것 없는 호칭을 물려받아야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지금도 앞으로도 내게 서열 1위는 그인 것을. 참 별볼일 없고 의미도 없는 호칭일지언정 그 이름을 주고 싶은 사람은 그뿐인 것을.
아직 훈련병 신분이라 화장이 끝나는 것도 다 보지 못하고 귀대해야 했던 그의 아들이 부대로 출발하기 직전 나를 안고서는 속삭이는 것처럼 남긴 한 마디가 아직도 귓전에 울린다.
"고모, 부탁해요..."
1964년 10월 13일 - 2011년 11월 27일
부디 평안히 영면하기를.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은 곳에서 이제는 웃고 있기를.
내 사랑하는 서열 1위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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